四君子와 蘭
벌써 초여름이다. 연두에서 청록에 이르기까지 녹음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살맛이 절로 인다. 해질녘 옷이 젖는 줄도 모르고 물을 주다 시선이 한 곳에 머물렀다. 풍란의 꽃이었다. 지난 겨울 혹한을 어찌 견디었는지 볼수록 대견했다.
해마다 이맘때면 서울 반포에 사는 김계두 형이 안부와 함께 풍란의 개화를 묻곤 했다. 사람이 그리워 유시에 매실주 몇 잔을 마셨다. 환자가 왠 술이냐는 아내의 만류에 '탈은 호흡기지 소화기는 멀쩡하다'고 둘러대었다.
매실주는 아는 이가 직접 담갔다고 보내준 것이었다. 주량은 예전의 십분지 일로 줄었는가 싶은데 취기는 그대로였다.
매화는 사군자 중 하나다. 퇴계 선생은 매화가 피는 겨울 섣달 초순에 운명했다. 그는 운명하던 날 아침, 기르던 분매(盆梅)에 "물을 줘라"고 명했다. 이것이 퇴계 선생의 마지막 유언이다. 퇴계는 이토록 매화를 혹애(酷愛)하여 매형(梅兄), 매선(梅仙) 등으로 부르며 깍듯이 인격체로 대우했다.
'四君子'는 梅∙蘭∙菊∙竹을 일컫는다. 식물에다 인격을 부여하여 '君子'라 하였으니 예삿일이 아니다. 군자란 명칭은 사회적인 지위가 있으며 덕성과 지성을 겸비한 최고의 인격자로서 학문에 통달한 사람을 일컫는데, 춘추전국시대에 유행했던 말이다.
사군자는 본래 회화(繪畵)에서 사용했던 말이 아니고 특정한 인물을 가리킨 말이다. 특정한 인물이란 전국시대 제나라의 맹상군(孟嘗君), 조나라의 평원군(平原君), 초나라의 춘신군(春申君), 위나라의 신릉군(信陵君) 등 뜻이 높은 네 사람을 골라서 그들의 높은 덕망과 인품을 받들기 위해 부른 이름이다.
많고 많은 꽃과 식물 중에서 매란국죽이 회화에 많이 쓰이게 된 것은 이들이 고결하고 지조 높은 기개와 격조 높은 품격을 지녔다 하여 앞서 말한 인물들의 이름을 표방한 데서 비롯되었다.
매화는 설한풍에 꽃을 피우기에 매화 이전에 꽃이 없다는 말처럼 추위를 무릅쓰고 봄을 제일 먼저 알리는 꽃이고, 난은 깊은 산중에 있어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고매한 꽃을 피우며 맑은 향을 세상에 퍼뜨리고, 국화는 늦가을 첫 추위를 이겨내며 꽃을 피우기에 국화 이후에 꽃이 없다 하여 서리를 이기는 꽃이라 하고, 대나무는 추운 겨울에도 푸르고 싱싱한 잎을 지니고 휠지언정 꺾이지 않는 지절을 지니는 등 그 생태적 특성이 하나같이 고결한 군자의 인품을 닮았기 때문이다.
매란국죽의 순서는 꽃피우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에 맞추어 배열된 것이며 회화의 기법 습득 단계로 본다면 가장 단순하고 기초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난초부터 시작하여 대나무, 매화, 국화 순서로 매겨진다.
매란국죽이 사군자로 칭하게 된 것은 명나라 진계유(陳繼儒)의 매란국죽4보(梅蘭菊竹四譜)에서 시작되었다.
옛사람들이 이들을 사군자라 하여 사랑하게 된 것은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더욱 꿋꿋하고 아름답고 의연하기에 그 성품을 높이 산 것으로, 선비들이 이들을 보며 스스로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고 늘 곁에 두고 그 뜻을 새기고자 하였다.
이들 네 식물들은 개별적 특성보다 전체적인 하나의 커다란 상징으로 부각되어 사군자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우리나라에서도 사군자는 높이 평가되어 고려시대부터 시문과 회화, 공예품 등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비록 사군자라는 개념이 문인화의 화목으로 중국에서 유입된 것이긴 하지만, 이를 바탕으로 우리 민족의 기질과 심성에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받아들여졌다.
매란국죽은 우리의 선조들에게서 극진한 사랑을 받았다. 여러 예술분야에서 주된 소재로 등장하였는데 이는 식물 자체의 아름다움보다는 그들이 지닌 상징적 의미, 즉 지조와 절개, 고아한 품격을 높이 산 것이다.
옛 선비들의 아호에도 매란국죽이 많이 쓰였다.
'매(梅)'자 들어간 아호로는 김시습(金時習)의 매월당(梅月堂), 성삼문(成三問)의 매죽헌(梅竹軒), 황현(黃玹∙梅泉野錄의 저자)의 매천(梅泉)등이 유명하고, '란(蘭)'자로는 박연(朴堧∙왕산악, 우륵과 함께 3대 악성)의 난계(蘭溪), 김병연(金炳淵∙김삿갓)의 난고(蘭皐), 차천로(車天輅∙선조 때의 명문장가)의 난우(蘭嵎) 등이 있었고, '국(菊)'자로는 이인직(李人稙∙'치악산' 등을 지은 신소설가)의 국초(菊初), 박수춘(朴壽春∙임란 때의 의병장)의 국담(菊潭), 권부(權溥∙고려 충렬왕 때의 주자학자)의 국제(菊齊) 등이 있었으며, '죽(竹)'자로는 민영익(閔泳翊)의 죽미(竹楣), 조봉암(曺奉巖)의 죽산(竹山)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중에서도 '난'은 그 청초한 자태와 향기로 하여 특히 여성들이 선호하여 신사임당(申師任堂)과 함께 조선시대 규방단의 쌍벽인 허난설헌(許蘭雪軒)을 비롯하여 난을 뜻하는 란(蘭), 혜(蕙) 외 소심(素心)에서 취의(取義)한 듯한 '소(素)' 등을 아호에 쓰는 이가 적지 않다.
매란국죽 중 우두머리는 어떤 것일까.
『공자가어』에서 ‘착한 사람과 같이 있는 것은 지초와 난초가 있는 방에 들어간 것과 같으니 오래 있으면 그 향기를 맡을 수 없지만 향기는 몸에 밴다’ 한 것은 난의 은은한 품성을 이른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말은 지초와 난초의 향기가 군자의 아름다운 덕을 비유해 도덕적 감화작용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주역』에서 ‘같은 마음을 가진 이의 말은 난초와 같이 향기롭다’고 한 것처럼 유학의 사회적 기능까지 난초의 상징으로 체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문인들 가운데 십중팔구가 난초를 좋아한다는 것은 과장되지 않은 진실이다. 그런 연유로 사군자 중 그 우두머리는 난이라 할 것이다.
사군자의 수장으로서의 난은 이제 산업으로서의 가치가 상징적 가치보다 더 중시되는 세상이 되었다. 난이란 말 속에 담겨진 의미나 정신은 뒷전으로 밀리고 감각적인 화려함을 취하는 조류가 형성되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거문고가 절음이 되고 군자란 말이 사어(死語)가 된 지 오래다.
언제가 될지 모르나 난의 상징이 살아난다면 군자가 살고 그 군자의 덕이 황량한 우리의 가슴을 채울 날이 오리라 믿어 마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