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춘란 홍화 '홍염' ©경북주재기자 김경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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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춘란의 태동
오늘의 동양란이 중국에서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북송 중기인 11세기 중엽 이후로 추측된다. 그 뒤 남송시대가 되면서 동양란은 그 동양적인 운치로 말미암아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시대에 묵화의 소재로 다루어지기 시작했으며, 그 후 명나라 때는 수묵 사군자의 하나로 지정되면서 더욱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문물이 유입되면서 소개되어 고려 중엽부터는 난을 관상용으로 키웠고, 말기에 이르러 가꾸고 즐기는 풍습이 늘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 같이 군자의 풍류로 일컬어지는 난의 생김새와 향취를 즐기는 풍습은 고려, 조선조로 내려오면서 사대부가로 널리 퍼졌는데, 희소한 양과 배양법의 무지로 근대는 물론 현대로 이어지면서도 소수의 특정계층만이 즐길 수 있는 소위 귀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말하자면 높은 격을 부여하되 지나치게 높아서 함부로 범접하기 어려운 식물이었던 것이다.
1950~1960년대에는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동양란을 접할 수 있었고, 서울을 비롯하여 일본과 가까운 부산 · 대구지역에서 취미로 난을 키우는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만 해도 난을 접하는 것 자체가 사치로 여겨질 수밖에 없엇다. 이때의 난가격은 만만치 않아 1960년대 중반 중국춘란 '송매'의 가격은 20만원을 호가하였다.
한국춘란이 기록으로는 이미 15C에 간행된 책자에 나타나 있으나 이는 기록일 뿐이었고, 극소수의 사람들이 조금 기르지 않았을까 하는 것도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춘란의 산채는 1970년대 중반 이후 애란인 몇몇에 의해 시작되었던 것이 서막으로 보여진다. 이후 마산, 목포에서 1982년쯤, 우리나라 제일의 자생지라는 함평에서는 1983년 봄에서야 채란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전체 난인 중에 아주 일부가 한국춘란에 관심을 가진 것이었고, 한국춘란의 위치는 극히 미미했다.
○ 1981년 난 수입자유화
1981년 6월 농수산부에 의해 난 수입자유의 공식적 개방이 발표되었다. 이로 인해 그동안 사치품 항목으로 묶여있던 동양란의 수입은 무역 자유화의 물결을 타고 원산지인 대만과 일본의 난이 대량 국내에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비로서 서민들에게 사랑받고 재배되며 취미생활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수입자유화로 일반인들이 쉽게 난을 접할 수 있었으나 여전히 난 가격은 고가였다. 그래도 난 수입자유화 조치가 우리나라 난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직은 한국춘란이 널리 알려지기 이전으로 당시 인기품목은 당연히 동양란이었다. '송매', '만자', '집원', '용자'의 중국춘란 사천왕을 대표로 하는 중국춘란 일경일화가 가장 사랑을 받았으며, 한란과 혜란이 뒤를 이었다. 한국춘란은 일부 젊은 애란인들 사이에서 서서히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어났고, 본격적인 채집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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