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열정
황금 돼지해라고 하여 기대가 충일했던 정해년이련만, 달랑 한장 남은 달력을 바라보면서 ‘벌써’ 하는 말의 위력을 실감한다.
해마다 이맘때면 아무것도 해놓은 것이 없는데 또 한해를 보낸다는 초조함과 위기감으로 늦게나마 자신을 다잡게 된다. 지난날을 자신을 다잡는 긴장감 속에서 보냈다면 성공을 축하하는 인사말을 얻었으련만, 작심삼일이란 달갑지 않은 말만 되뇌이며 후회를 하게 된다.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면서 저마다 새로운 각오를 다진다.
옛 중국의 반명(盤銘)에 ‘日新 日日新 又日新’이란 금언이 있었다. 즉 ‘날로 새롭고 나날이 새롭고 또 새롭거라’라는 뜻이다. 이것은 소반에 새긴 명문으로 음식은 항상 신선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하지만 신선해야 하는 것이 어찌 음식뿐이겠는가.
사람들은 무엇인가 도모하며 살아간다. 무엇을 도모하는가에 따라 그 행동도 달라진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무엇을 실천하기에 앞서 겁부터 내고, 그래서 적당히 살며 스스로를 위안하려 한다. 하지만 열정을 지닌 사람은 모든 일에 적당히 타협하지 않는다.
앤디 앤드루스는 ‘열정은 멋진 꿈을 가진 사람을 도와주는 힘이다. 열정은 확신을 낳고 평범한 사람을 뛰어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고 했다.
누군가의 멋진 꿈이 때로는 어리석음에 비유되기도 한다. 어리석음을 두고는 ‘우공’과 ‘과보’가 회자된다. 우공은 우공이산(愚公移山)의 고사로 잘 알려진 인물이며, 과보는 태양을 잡으러 간 거인 신화의 주인공이다.
과보의 신화는 이러하다.
중국 북쪽에 과보족이라는 엄청나게 힘이 센 거인들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과보족 가운데 한 사람이 하늘을 바라보다가 문득 태양을 붙잡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과보족 거인은 그때부터 성큼성큼 해가 지는 서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달려간 과보가 태양을 만난 곳은 우곡이었다. 우곡은 해가 지는 곳이다. 흥분한 과보는 손을 내밀어 태양을 안으려고 했다. 그 순간 과보는 먼 길을 달려온 피곤함과 갈증을 강하게 느끼고 그 자리에 엎드려 황하의 물을 모두 마셨다.
그렇지만 좀처럼 갈증이 가시지 않아 북쪽에 있는 엄청 큰 호수인 대택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 곳에 이르기 전에 목이 말라 죽고 말았다. 그는 죽으면서 손에 쥔 지팡이를 떨어뜨렸다. 지팡이가 떨어진 곳은 곧 바로 울창한 숲으로 변했고, 그 후 사람들의 갈증을 단번에 풀어주는 달콤한 복숭아 열매가 잔뜩 열렸다.
지난 11월 8일, SBS ‘세상에 이런 일이’란 프로에 필자의 작업실이 방영되었었다. ‘장가계(張家界)를 만드는 사나이’ 편으로 어떤 이가 방송국에 제보하여 이루어진 일이었다. 사람이 천하절경 장가계를 흉내낸다는 것이 가당찮은 일인 줄 알고 있으나 방영 후 격려 전화와 방문이 이어지고 있어, 8년 세월 공을 들인 일이 도로에 그치는 일이 아닌가 싶었는데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태양을 쫓아간 과보와 산을 옮겼다는 우공은 과연 어리석은 사람일까. 그들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멋진 꿈을 지닌 사람들이라 나는 믿는다. 만약 그들이 어리석다면 그들의 어리석음은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꿈이며, 그들은 그 멋진 꿈을 실행한 사람들이다.
난 기르기는 ‘송매에서 시작하여 송매로 끝난다’는 말이 있다. 이는 다양한 품종의 난을 기르다 결국 송매로 돌아온다는 것으로, 난 기르기에 있어 보수적인 면을 설명하고 있다. 글로벌시대에 난계도 많은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변화에 적응하는 일 또한 애란인의 몫이지 싶다.
월계수고 근자가절(月桂須高 勤者可折 ; 달의 계수나무가 비록 높다 할지라도 부지런한 자는 결국 끊는다)이라고 하는 유가의 시가 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유가를 두고도 어리석다 했으련만, 이 시가 시로 끝난 것이 아니고 미국의 암스트롱이 결국 달을 밟았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뜻을 세웠다면 어리석다고 놀림을 받을지라도 과보처럼 끝까지 가고 볼일이다. 비록 실패로 끝날지라도 남을 위한 지팡이 하나쯤은 남길 수 있으리라. 가다가 중지 곧 하면 아니 간만 못하다고 옛 사람들이 일렀기에 더욱 그러하다.
애란인들이 멋진 꿈 하나를 열정으로 키워가는 무자년(戊子年)이 되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