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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건 칼럼> 실패가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기사입력  2022/09/30 [23:27]   이대건 난아카데미 원장

"한국난계 변해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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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건 난아카데미 원장     ©김성진

 


난초 명장의 성장일기(7)

 

- 실패가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천신만고 끝에 스승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승님으로부터 파문을 당하고 말았다. 내가 난초 도둑으로 몰려서이다. 당시 난원의 VIP고객께서 위탁한 난초가 도난을 당했는데 고가의 난초는 이미 사라져버렸고 책임질 사람은 있어야 해서 내가 책임을 지기로 마음먹었다.

 

훗날 진범을 잡아 모든 오해가 해소되었지만 당시로는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하는 상황이었고 나는 그 운명을 받아들였다.

 

범인으로 몰린 후에도 나는 매일같이 난원을 찾아가 스승님께 기술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스승님도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당시에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상황이 정리된 후 스승님은 물었다.

너는 정말로 지독한 아이구나. 억울하지 않니?”

나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나 말고는 용의자가 없잖아요?”

 

그날 이후 나는 새로운 기술을 전수받기 시작했고 점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열심히 배우고 익히며 난초에 재미를 더하고 있을 때 스승님이 나를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더 이상 너에게 가르쳐줄 기술이 없다. 그러니 너의 길을 스스로 가거라.”

이때 스승님께서 세 가지 당부를 하신 것이 기억이 난다.

첫째, 속이지 않고 성공하는 케이스를 만들어보아라.

둘째, 대학에 가서 난초에 대한 체계를 구축해보아라.

셋째, 한국 난초 기술 분야에 1인자가 되도록 열심히 길을 걸어가라.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 약속을 모두 지킨 것 같다. 나는 199531일 결혼과 동시에 관유정이란 간판을 걸고 다시 난원을 차렸다.

 

관유정을 차리기 전 나는 동네의 OK볼링장을 드나들며 사람들에게 난초를 해보라고 권했다. 난초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난초를 권한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저변확대이다.

 

그곳에서 지금의 아내와 인연도 맺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을 토대로 관유정의 이름을 딴 유정난우회를 결성했다. 내가 난초에 뛰어들어 첫 번째로 만든 난우회였다.

 

나는 지금껏 난우회 3(유정난우회, 여울터난우회, 대구난연구회)를 만들었는데 모두 난초를 하지 않는 분들을 사귀어 만든 것이라 자부심이 있다. 나는 유정난우회 초대 총무를 맡으며 새로운 길을 나섰다. 방문객들에게는 <난과생활> 월간지를 무료로 나눠주며 난초에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도우며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갔다.

 

당시 보증금도 없는 월 10만 원짜리 차고를 빌려 난원을 차렸다. 겨우겨우 운영을 하던 중 428일 난가게 바로 옆 대로에서 도시가스가 폭발했다. 가게 유리창은 산산조각이 났고 온 동네가 아비규환이었다. 실제 팔과 다리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본 사람도 많았다.

 

어렵게 준비한 종자 목들이 유리파편에 강타 당했다. 난초 잎들에 상처가 나 상품성을 잃어버렸다. 일부 난초는 사망하기도 하였다. 두 번째 난원도 개업한 후 두 달이 채 되기도 전에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피해보상은커녕 정신적인 충격만 가득한 상태로 나는 실의에 빠졌다.

 

정신을 추스르고 새로운 걸음을 재촉했다. 당시 내가 불쌍해 보였던지 유정난우회 회원들이 많이 도와주어서 그럭저럭 먹고 살 수는 있었다. 1년여가 지나 형편이 나아져 평수가 조금 넓은 곳으로 옮길 수 있었다.

 

돈이 없어 권리금이 없는 점포를 구하다보니 신축 건물에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에서 또 한 번의 실패를 맞이했다. 난초들이 하루가 다르게 생기를 잃어갔다. 당시 나는 무슨 영문인줄 몰랐다.

 

그런데 어떤 고수 분께서 방문해 새집증후군 때문에 난초가 죽는다.”고 말해주었다. 당시 난가게 옆 상점에서 인테리어 공사를 했는데 시너와 여러 가지 환경호르몬에 의해 난초가 고사한 것이었다.

 

다시 원점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어둡고 힘든 시절이었다. 밑천 이라곤 보증금 뿐 그때 결심했다. 보증금으로 농사가 잘되는 비닐하우스를 지어야겠다는 것이었다.

 

건물 내부에서는 난초가 잘 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했다. 여기저기에서 빚을 내 근처 야산 자락 논을 빌려 비닐하우스를 지었다. 상호명은 한국춘란 복륜전문점 관유정이었다.

 

여기에서 나는 기술을 터득해야 먹고 살 수 있다라는 일념으로 꽃은 황화를 엽예품은 복륜을 연구했다. 황화는 이미 생화 도매상에서 익힌 터였고 돈이 없어 중투나 기타 엽예품들은 하지 못하고 비교적 저렴한 복륜을 연구했다.

 

5년간 일본산 한국산 복륜을 대량으로 기르며 잎과 꽃의 상관관계 등을 연구했다. 이때 연구 노하우가 산채 복륜으로 원판+황색+심대복륜화를 개발하게 되었고 지금은 증식 중인데 해외 바이어들이 동양 3개국의 기록을 세운 복륜화라고 말한다.

 

비닐하우스를 짓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빚을 낸 돈으로 지은 비닐하우스가 간판도 달기 전 새 찬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날아가 버린 것이다. 돈을 아껴보겠다고 내가 손수 지은 것이 화근이었다. 몇 푼 아끼려다 오히려 큰 화를 당하고 만 것이다.

 

다시 빚을 내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튼튼한 난실을 지었다. 비닐하우스 안에 샌드위치 패널로 거처도 만들었다. 새 샌드위치 패널 살 돈이 없어 중고를 구입했는데 각이 맞지 않아 여름이면 모기떼가 극성이었으며 독사가 방안으로 들어올 때도 있었다. 그래도 난초를 기르고 판매하는 재미로 어려운 줄 모르고 지냈다.

 

5년 정도가 흐르자 난원도 제법 자리를 잡았다. 난우회도 하나 더 만들어 함께 교류하며 난초를 길렀다. 겨우 안정이 돼 가고 있을 즈음 큰 위기가 닥쳤다. 중국에서 산채된 무향 춘란이 한국산으로 둔갑해 대구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대구뿐만 아니라 전국이 한국산으로 둔갑한 중국춘란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아무런 대책 없이 가만히 있다가는 난계가 무너질 것이 우려되었다. 실제 문을 닫은 난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중국춘란 감정소를 차렸다. 인터넷에 홈페이지를 만들어 한국난계를 지키자!’는 운동을 전개했다. 전국의 회원들과 함께 국난바로세우기 운동본부를 만든 것이다.

 

당시 경기도 지부를 맡은 안산의 전병호 님, 전라도 지부를 맡은 박일 님과 함께 레지스탕스 운동을 전개하였다. 국난바로세우기 운동본부는 멤버와 지지자가 늘어남에 따라 난초기술 요청도 늘어났다. 그것이 계기가 돼 난 아카데미를 개설하게 되었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나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지지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그 의미를 잊지 않고 보답하려다 보니 난계를 살려야겠다는 사명감도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이 오늘 나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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