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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보 칼럼> 탁영(濯纓)
기사입력  2020/01/18 [22:29]   이성보 거제예술랜드 원장

 

 인터넷蘭신문 '난과함께'는  역사와

애란인의 역사를 기록 보존합니다.

 (2020.1.17일 현재 : 난관련 자료 11.492건이 DB화 되어 있습니다)

 

 

▲ 2019 제주향란회 새우란전시회 출품작     ©김성진

 

탁영(濯纓)

 

왜 난을 기릅니까?”

지난 날 이런 질문을 받곤 했다. 궁리 끝에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답하곤 했다.

세월이 지난 지금 그래서 행복하십니까?”하고 누가 묻는다면 대답이 궁할 수밖에 없다. 행복하다고 할 수도, 불행하다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일을 실컷 하고 있으니 어찌 보면 행복한 것 같기도 하고, 채무에 시달리고 있으니 또 어떻게 보면 불행하기에 하는 말이다.

 

1981년 난의 수입자율화와 때맞추어 일기 시작한 자생란 붐은 30년 정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애란인구가 100만을 헤아리게 되었으니 놀라울 따름이다.

 

경향 각지에서 열리는 전시회만 해도 100회가 훨씬 넘는 정도이니, 난으로만 친다면 태평성대가 아닐 수 없다. 이제는 하나같이 난의 외양에만 치우쳐 본래의 상징적 가치보다 상업적 가치가 더 중시되는 세상이 되었다.

 

이렇다 보니 문제점 또한 적지 아니하다. 선인들이 난에 대하여 가졌던 유학사상 고유의 상징적 가치를 탁영(濯纓)’이란 글을 통하여 단편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탁영(濯纓)’은 연산군 때 무오사화(戊午史禍)의 피해자인 김일손(金馹孫)의 호이다.

선생의 호 탁영은 무슨 뜻일까. 단순히 갓끈을 씻는다는 해석만으로는 알 수 없다.

탁영이나 창랑은 기원전 3세기, ()나라의 대시인이었던 굴원(屈原)의 유명한 어부사에 나온다. ,

 

창랑지수청혜 가이탁오영(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지수탁혜 가이탁오족(滄浪之水濯兮 可以濯吾足)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으리

 

이라는 구절이다. 이 세상에 도가 행해지면 머리를 감고 갓끈을 씻고 의관을 정제하여 벼슬을 하고, 도가 행해지지 않는 세상이면 내 더러운 발이나 씻고 벼슬자리를 내놓은 다음 초야에 묻혀 살아 세상의 청탁(淸濁)에 맞는 처신을 하겠다는 뜻이다.

 

탁영을 호로 정한 김일손 선생은 주로 언관(言官)으로 있으면서 유자광(柳子光) 등 훈구파 학자들의 부패와 비행을 앞장서서 비판했고,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으로 있을 때는 세조찬위(世祖簒位)의 부당성을 풍자하여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어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 때 처형당했다.

 

진주 촉석루에 그가 남긴 금란계(金蘭契) 현판이 있다.

조선 중종조에 경상도 개령(開寧) 현감을 지낸 이원례(李元禮)와 당시 진주목사 등이 중심이 되어 조정과 영남 일원의 시문에 능한 사람 31명이 금란계(金蘭契)라는 문계(文契)를 조직해 정기적으로 촉석루에 모여 시문을 지으며 교류했다고 한다.

 

지금도 김일손이 지은 금란계 결성의 취지와 31인의 품계와 관직, 성명, , 본관을 적은 현판이 촉석루 전면 우측에 걸려있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부민 남녀노소가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처절하게 옥쇄(玉碎)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어부사에서 탁영을 남긴 굴원(屈原)은 어떤 인물이었는가 살펴보자.

초나라의 위대한 시인이며 고위관료였던 굴원의 주장을 듣지 않던 회왕은 진()의 포로가 되었다가 살해됐다.

 

회왕의 아들 경양왕(頃襄王)이 들어서자 굴원은 왕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정적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양쯔강(揚子江) 이남의 소택지로 유배당했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임금을 생각하고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여러 아름다운 화초를 통해 표현했다. 그것도 간신들의 모략을 분별하지 못하고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은 왕을 생각하고 화초를 가꾸었다.

 

그가 심고 가꾼 것은 단순한 난초가 아니고 자신의 충심이었다. 난초와 잡초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권력자들에게 대한 분노와 궁핍한 생활에서 오는 고통을 난을 심어 가꿈으로써 희망으로 의탁하고자 했다.

 

그는 그 유명한 이소(離騷)라는 시에서 내 이미 구원()이나 되는 넓은 밭에 난을 심었고 또 백묘(百畝)의 밭에 혜를 심었도다. / 중략 / 탐욕을 다투는 뭇 소인배들은 오로지 군자의 단점을 찾는데 싫증도 아니나는지 / ! 속으로는 자신을 속이면서 남의 흠집을 따지니 심통이 질투뿐이구나라고 읊었다.

 

그는 난을 자신을 알아주는 친구로 여겼다. 이 작품은 후세 사람들이 작품성을 높이 평가해 작품명에 경()자를 붙여 이소경(離騷經)’이라 해서 경전의 반열에 두어 중국시가문학의 전범으로 삼았다.

 

굴원은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어 난이 시들고 향기를 잃을까 걱정하며 안타까워한다. 그는 끝내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회사(懷沙)의 부()를 남기고 고결한 성품을 그대로 간직한 채 돌을 안고 미뤄강(汨羅江: 지금의 汨水)에 몸을 던져 생을 마쳤다.

 

굴원의 구원란()은 충절의 상징으로 후세 사람들의 시구나 화제(畵題)에 수없이 인용되었다.

 

행여 행복하기 위하여 난을 기른다면 난의 덕목을 음미해보기를 권한다. 자신이 난을 대함에 있어 초심을 잃은 것은 아닌지, 한번쯤 자문해봄직도 하다.

당신은 난을 왜 기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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