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蘭신문 '난과함께'는 한국의 蘭 역사와
(2019.12.19일 현재 : 난관련 자료 11.117건이 DB화 되어 있습니다)
언어는 짧고 침묵은 하염없이 긴 넉 줄 시
지창(紙窓)
- 理石 육근철 -
난향이
들리는 저녁
서성이는
발걸음
동양의 시인 묵객들은 난초를 난초라 말하지 않고 “난(蘭)”이라 하였다. 그리고 난을 그리는 행위를 “그린다”라고 하지 않고 “친다”고 표현함으로써 일반적 식물의 한계를 뛰어넘어 의미론적 이미지식물로 난을 승화시키고자 하였다. 그 이유는 난을 통하여 마음을 맑게 하고, 우주와 소통하는 깨달음을 얻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동양의 시인 묵객들은 식물학적 녹난(綠蘭)을 기르기 전부터 묵난(墨蘭)을 화선지에 쳐 마음 거울을 닦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작금의 난계는 이러한 철학적 바탕을 잃어버린 듯하다. 3월이면 전국에 수십 개의 난 단체에서 난 전시회를 개최하는데 이 전시회가 미인대회처럼 난인들의 마음을 흐려놓고 있다. 난초는 원래 산에 사는 식물이다. 그 난초를 캐서 속세로 끌고 내려와 서열을 메기고 상을 줌으로써 경쟁의 대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한다. 난초는 산에 사는 식물이라는 것을. 영화 킹콩에서 인간에게 잡혀 온 고릴라가 보름달이 뜨면 고향 정글이 생각나 발작을 일으키는 것처럼, 집에서 기르는 난초도 산 그림자 소리를 그리워한다는 것을......
난(蘭)//난초는/그리워한다/산 그림자/소리를
지창에 비치는 난 잎의 그림자를 보면 거기에 직선과 곡선이 겹쳐 봉황의 눈을 그려 놓기도 하고, 수묵색 호수의 물그림자를 만들기도 한다. 특히 잎 선이 그리는 공간의 미학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제 창가에 난 한 두 분 기르면서 눈에 보이는 녹색의 난만 보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심상(心象)의 난을 보며 마음 수양을 하면 어떨까.
gdyuk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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