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蘭신문 '난과함께'는 한국의 蘭 역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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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은의 <蘭중일기> 제행무상
책 좀 가져가라, 아니면 고물상에 확 줘 버린다며 심히 거칠고 앙칼진 목소리가 폰을 넘어 왔다. 엄마였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 전에 읽었던 책들이 먼지를 옴팍 뒤집어 쓴 채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친정을 오갈 때마다 부모님이 쌍심지를 켜고 욕 가락을 뽑아내더니 기어이 처분하기로 오지게 마음을 먹은 듯 했다.
전화를 끊고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책장은 기본이고 부엌이며 탁자며 침대 밑이며 발디딜틈 없이 빼곡히 늘어진 책들이 가히 늪지를 이루고 있었다. 사태가 이러하니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남편은 물론이고 아이들까지 살기가 등등했다.
그때마다 나는, 그 뭐냐 잡스나 아인슈타인 서재 봤지? 그 정도 진창은 되어야 뭔가가 나와도 나오는 거야. 그리고, 남편아. 당신은 말할 계제가 안 된다는 거. 내가 이러는 거는 당신이 벌려놓은 ‘난초’ 판과는 새발에 피라는 거. 알지? 이런 궁색한 변명으로 여태껏 버터 왔건만, 아. 이럴 어쩐다. 내 피끓는 심장이 박힌 그 소중한 책들을 한 낯 고물상으로 보내버릴 순 없지 않는가.
그래도 명색이 책인지라, 시립 도서관에 기증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맨발로 뛰어나와 반길 줄 알았던 사서에게서 들려온 말은 내 귀를 의심케 했다. <미안하지만 사절입니다. 차고도 넘칩니다>. 헐. 혹시나 해서 교도소, 병원 등에도 의뢰를 했지만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고민 끝에 내가 거래하는 알라딘(온라인책서점) 중고라인을 이용해 보기로 했다. 지적 유희를 더 많은 사람과 향유하기 위해서라는 거시적인 기치를 세워가며 밤새 목록을 작성하고 넷 상에 올렸다. 결과는 의외였다.
오래도록 베스트셀러였던, 여느 기억 속에 한 권씩은 꽂혀 있을 법한 이를테면 하루키나 베르나르의 소설들은 짐짝 취급을 당했고 오히려 고루하기 짝이 없는 종교나 영성, 철학을 다루는 서적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날개 돛힌 듯 팔려나갔다. 기이한 것은 오래전 품절된 고서들은 정가의 두서너 배는 물론이고 그 이상을 호가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이, 뭐하시나. 이 시국에 난실도 한 번 안가보고! 요 며칠 내가 하는 모양을 묵묵히 보고만 있던 남편이 기어이 잔소리를 해댔다. 그럼 그렇지. 어째 조용했다 내가. 하긴, 지금 이 시국이란 놈이 무시무시하긴 하지. 한일전에, 미중전에, 환율폭등에, 주가폭락에 덩달아 <난계까지 꽁꽁 얼어붙었으니>
쩝, 일구가 무언이다.
게다가 그 살인적인 무더위를 힘든 기색하나 없이 거뜬히 이겨내던 놈들이
아침에 눈뜨기 무섭게 하나씩 ‘졸卒’해버리니 남편 속도 말이 아닐 것이다.
남편 등살에 책 팔이를 뒤로 하고 간만에 난실로 입장하니, 막내가 죽을상을 하며 형수님. 또 한 놈 갔어요.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내 보이는 손바닥에는 바싹 마른 ‘산반’이 막 숨이 멎어있었다.
오호통재라! 하필 막내가 최애하던 그 황산반이었다. 막내는 유달리 ‘산반’을 좋아했다. 난실 죄다 산반 일색인 그를 보고 사람들은, 최근에 산반이 인기가 좋은 것은 지나가는 바람일 뿐이다, 옛날에 산반은 산에서 보면 에잇 하며 그냥 내다버렸다,
무늬가 화려하면 뭐하나. 시간이 지나면 다 날아가 잎도 꽃도 아무 것도 안 된다, 만에 하나 멋 떨어진 산반화가 피었다 한들 담 번에 그대로 피워 준다는 보장이 없다, 고정이 안 되면 가치도 없다, 한마디로 ‘돈’이 안 된다. 하며 하나같이 입들을 놀려댔다.
그럴 때마다 막내는,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다, 난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좋아하는 데 ‘돈’이 되고 안 되고는 별개다, 잘 생각해보라, 지금 당신들의 난실에는 ‘돈’되는 난들만 있나, 아니지 않나, 더군다나 부처님도 말씀하셨다, 제행무상이라고. 이 세상 만물 중에 변하지 않는 게 어디 있나. 불변이란 없다. 순간의 연속일 뿐이다 라고 핏대를 올려 세웠다
그런 그를 보고 있자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숀’을 떠 올린다. 이이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라는 영화에서 저명한 사진작가로 등장한다. 그는 히말라야에서 사는 생애 한 번 볼까말까한 <유령 표범>을 사진에 담기위해 숯한 날을 지새우다 드디어 렌즈에 그 녀석을 포착하게 된다.
하지만 차마 셔트를 누르지 못하는 숀을 옆에서 지켜보던 월터가 왜 그러냐고 의아해서 묻는 장면이 나온다. 숀은 그 녀석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비로소 말한다.
< 그저 그 순간 속에 머물고 싶어 > 라고.
혹시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시리즈'를 판매하신 분인가요? 난실을 막 나서는 데 어느 노회한 목소리가 폰을 넘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