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蘭신문 '난과함께'는 한국의 蘭 역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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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超人)을 기다리며
중추가절(仲秋佳節)이라 하건만 금년 추석은 썰렁했다. 연휴가 짧기도 하려니와 계속되는 불경기는 명절 분위기를 흐려놓았다. 거기에 가을 가뭄까지 심해 이곳 동부저수지는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다.
때맞추어 북상하는 제13호 태풍 실라코의 진로가 일본 오끼나와 쪽이라 하여 가슴을 쓸어내렸다. 태풍은 언제나 앞머리에 폭우를 동반하기에 비를 기대했으나, 비는커녕 늦더위만 몰고 와서 그렇잖아도 썰렁한 추석 분위기를 망쳐버렸다.
저수지가 바닥을 드러내면서 새들이 모여들었다. 만수 때는 고작 한두 마리가 보일 뿐이었는데, 물이 말라가는지를 어떻게 알았는지 웅덩이마다 수십 마리의 새때들이 진을 치고 있다. 진을 친 새때들을 보다말고 옛말을 떠올렸다.
도리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 下自成蹊), 사기(史記) 이광전에 나오는 말이다. 즉 복숭아와 오얏은 꽃과 열매가 있어 초대하지 않아도 다투어 사람이 찾아오기에 그 아래 저절로 길이 생긴다는 것으로, 덕망이 있는 사람은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뜻인가 싶다.
고기를 엿보고 모여든 새들도 말라가는 웅덩이의 물과 함께 사라지어 이제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예년 같지 않은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의 일이다. 손님이 뜸하여 좀 일찍 문을 닫으려는데 여섯 명의 손님이 왔었다. 청주에서 왔다는 그들에게 일분만 늦었어도 입장하지 못했을 거라며 몸소 가이드를 자청했다.
“아는 이가 거제에 가면 ‘바람의 언덕’을 꼭 가보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왜 이곳을 가보란 얘기를 하지 않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란 말을 몇 차례나 했다.
말 하는 이의 눈빛이나 어감으로 보아 결코 빈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예년에 비해 절반에도 못 미치는 관람객으로 하여 분위기가 엉망이었는데, 진한 감동으로 행복해하는 이들로 해서 나 또한 고조되어 묵은 피로까지 씻기는 느낌이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와 더불어 세계 3대 테너 가수다. 그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온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가수가 오랜 해외 순회공연을 마치고 귀국해 독창회를 열기로 했다. 팬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극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런데 막상 공연 시작을 알리는 벨이 울리자 사회자가 사색이 되어 뛰어나왔다. 마이크를 잡은 그는 당황한 목소리로 객석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여러분이 기다리는 가수가 비행기 연착으로 좀 늦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잠시 우리나라에서 촉망받는 신인가수 한 분의 노래를 먼저 들려드리겠습니다.”
사회자가 소개한 신인가수가 무대로 올라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으나 실망한 청중들은 본 체도 하지 않았다.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그는 최선을 다해 노래를 불렀으나, 노래가 끝난 뒤에도 박수를 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때였다. 갑자기 극장의 2층 출입구에서 한 아이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아빠, 정말 최고였어요.”
신인가수의 눈에서 눈물이 반짝였다. 그리고 청중들의 얼굴에도 따스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갈채를 보냈다.
단 한사람이라도 진정으로 자신을 인정하여줄 때 사람들은 용기를 얻는다. 그 신인가수가 바로 루치아노 파바로티였다. 이탈리아 출신인 그는 파이프오르간 소리처럼 끝없이 나오는 맑고 긴 지속음과 힘이 넘치는 목소리로 해서 이 시대 최고의 테너라는 평가를 받았다.
훗날 그의 오페라 공연 때 한 시간 동안 박수가 그치지 않아 165번이나 커튼콜을 받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작년 9월, 향년 73세로 췌장암과의 투병 끝에 영면했다.
이곳의 문을 연 지 15년, 꽤나 긴 세월 동안 나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렸다. 내가 기다리는 초인은 진정으로 나를 인정하여주는 사람을 일컫는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의 마지막 손님이 비록 내가 기다리는 초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의 감동이 커다란 격려가 되었다. 굳이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士爲知己子死)’라고 하는 사마천 선생의 말씀을 빌리지 않더라도 나를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이에서 더 바랄게 있겠는가.
난력이 오래다 보면 난우도 많을 것이다. 진정으로 나를 알아주는 난우가 있다면 성공은 몰라도 행복은 하지 싶다.
“추석을 어떻게 보내느냐”며 추석날 아침 일찍 전화가 걸려왔다. 매란방 홍승표 선생이었다. 얼마 전 심장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그와는 비슷한 시기에 신산을 함께 겪었기에 아픔을 헤아리기 남달랐다. 전화를 받고나서 내가 기다리는 초인이 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고 힘들기는 하지만 초대하지 않아도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기에 나는 외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