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艸 최병로 선생의 저서 『숨어있는 韓國의 蘭 歷史를 찾아서』를 인터넷난신문 '난과함께'에 1달에 1번씩 연재하게 되었습니다. 본 연재를 허락해 주신 고인의 아들 최유섭 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본 연재를 위하여 노력해 주신 난과생활 이영규 국장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저자약력
○ 山艸 최병로(1936~2014) 시인, 문학평론가
○ 1100년대 임춘《서화집》, 이규보 《동국이상국집》의 고려시대부터 1990년대 정을병 선생의 근·현대시대까지의 한국 난 역사를 기록한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는 『숨어있는 한국의 난 역사를 찾아서』는 저자의 많은 노력과 애정이 깃든 책으로 한국 난역사의 소중한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 저서
서사시조집 『호명산 농가』, 『전주최씨사 연구』, 『불멸의 명장 이순신 內 인물지』등
머리말
이 책은 1100년대 임춘 <서하집>, 이규보 <동국이상국집>의 고려시대부터 1990년대 정을병 선생의 근·현대시대까지의 한국 난 역사를 기록한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한국 난 역사의 기원부터 근·현대 난 역사를 마치 저자가 장거리 시대 여행을 통해 찾은 것처럼 정리한 한편의 기행문 같은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람을 좋아해 가람의 글을 읽다가 난에 대한 열정을 발견하고 난에 관심을 갖게 되어 난 역사 기행을 시작하게 되었다.”(저자의 말)
저자는 서울 종암동에서 지물포 생업을 운영하는 가운데에서 수많은 고서적을 탐독하고, 자료를 모으고, 현장을 찾아가면서 써내려간 많은 기록들을 1990년부터 1997년까지 8년 간 월간‘난과생활’에 연재하게 되었다.
그 첫 번째가 1990. 1월부터 1990. 10월까지 연재한『가람의 난향(蘭香)』이다.
가람 이병기 선생의 일기와‘가람문선(文選)’등의 기행을 통해 가람이 난을 키우게 된 동기, 가람의 난사랑, 가람의 난교(蘭交) 그리고 가람의 마지막 시조 작품이『蘭과梅』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가람일기(1964. 1. 14일)
“서리가 왔다, 신막 갔다. 병룡이와 술을 먹다. 오후 5시 병룡이가 오다. 시조 1수(首)지어 읊었다.”
가람文選에 실려있는 시조『蘭과 梅』
蘭을 蘭을 나는 캐어다 심어도 두고
좀먹은 古書를 한옆에 쌓아도 두고
滿發한 野梅와 함께 八九년을 맞았다.
다만 빵으로써 사는 이도 있고
營譽또는 信仰으로 사는 이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세상을 이러하게 살고 있다.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가람의 난향(蘭香)을 9회에 걸쳐서 연재하였다. 제목을 가람의 난향(蘭香)으로 하였지만 실제로는 가람의 난사(蘭史)라 하겠다. 가람의 난사는 한국 근대사의 난사라 할 수 있으며, 앞으로 어느 누군가에 의하여 가람 이전의 한국 난사와 가람 이후의 한국 난사가 쓰여지길 기대한다.”
(저자의 말)
그 두 번째는 1991. 1월부터 1991. 7월까지 연재한『최초의 난인(蘭人)과 분란(盆蘭)』
이다.
‘한국 최초의 난인은 누구일까?’
이 같은 궁금증을 가지고 시작한 기행은 1163년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과 그보다 50년 앞선 기록인 시인 임춘의 <서하집>에서 시작해서 목은 이색의 <목은시고> <목은집>, 도은 이숭인의 <도은집>, 양촌 권근의 <양촌집>, <삼봉집>, <동문선>, <포은집>, <성소복부고>, <태종실록>, <향약집성방> 등의 기행을 통해 한국 최초의 난인(蘭人)은 척산군(陟山君) 박원경과 난파(蘭坡) 이거인 임을 밝혀내었다.
“정동오 박사의『한국의 정원』동국이상국집 조경식물표에 의하면 한국 문헌상 난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163년으로 표시되어 있었으며, 이에 이규보 동국이상국집 11권에 수록된 시를 읽으면서 한가지 떠오른 것은 이규보 당시까지도 고려인들은 난초를 분에 심어 기르지 않고 그냥 정원 모퉁이에 심어 길렀던 일종의 야생종이었다는 점이다. (중략)
고려 인종 때 시인 임춘의 서하집에 보면 난에 대한 기록이 두 번씩 나온다. (중략)
그러나 또한가지 밝혀두고 싶은 것은 이규보나 임춘이 난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고려시대 최초의 난인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저자의 말)
“이거인은 1346년경 출생하여 1402년 57세 일기로 사망한 여말선초의 난인(蘭人)이요, 동시에 한국 최초의 난인이라 말할 수 있겠다. 심산유곡의 난화(蘭花)와 같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난파 이거인이 이제는 그 일부나마 그 모습이 어느 정도 드러났다는 것이 한없이 기쁜 일이며 보람된 일이라 생각된다.”(저자의 말)
그 세 번째는 1991. 9월부터 1992. 9월까지 연재한『제二의 난인(蘭人)과 조선시대 난
분(蘭盆)문화』이다.
최초의 난인에 대한 기행을 마친 저자는 당연히 제二의 난인을 찾기 위한 기행을 시작하였고 강희안의 <양화소록>, <세종실록>, <화암수록>, <동문선> 등을 통해 한국 제二의 난인이 비해당(匪懈堂) 이용과 강희안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한국 난문화의 새순은 최초의 난인이라고 한 척산군(陟山君)과 이거인에 의하여 꽃눈이 텄고 이어서 비해당 이용과 강희안에 의하여 상작의 꽃이 피었으나(계유정란에 의하여) 마침내 낙견(落肩)되고 말았는데, 강희안의 <양화소록>서문을 읽어보면 그 사실들이 더욱 자상하여진다.”
(저자의 말)
“한국 최초의 난인이라고 할수 있는 척산군과 이거인 시대에는 난(蘭) 이란 기록만 있었을 뿐 혜(惠)란 말은 전혀 발견됨이 없는데 반하여 제二의 난인이라 말할 수 있는 이용과 강희안의 시대에 들어서면 비로서‘혜(惠)’란 기록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하여튼 성삼문의 오설란을 통해서 볼 때 이용의 화실에는‘난(蘭)’과‘혜(惠)’가 똑같이 놓여있음이 분명하며 당시 사람들은 혜를 가르켜 오설란 이라고 불렀을 것이다.”(저자의 말)
또한 이번 기행에서는 강희안의 <양화소록> 난 재배법이 현대 애란인 재배법의 시초
라는 사실도 한자의 재해석을 통해 알게 되었던 재미있는 사례도 있었다.
<양화소록> 혜란편 中『花木宜忌, 云種蘭惠忌用水酒』의 일반적인 해석은“<화목의
기>에 이르되, 난초와 혜초를 심는 데 수주(水酒)를 쓰는 것을 꺼린다(忌用水酒)”라는
해석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재해석하였다.
<화목의기>에 이르되, 난초와 혜초를 심는데 수주(水酒)를 잘 이용하라(忌用水酒).
“그러므로 난초잎을 술로 닦아줌은 이미 <양화소록>시대부터 있었던 것이다. 산에서 떠온 야생란의 경우 그 잎을 술로 닦아줌은 해충에 대한 소독의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한가지 주의 할 것은 알코올 도수가 너무 높은 술은 금물이다.”(저자의 말)
그 네 번째는 1992.10월부터 1994.6월까지 연재한『추사(秋史)의 난향(蘭香)』이다.
“추사의 학술적인 업적은 (1) 한국 역사에서 금석학을 정립한 최초의 인물, (2) 한국 서예사의 독보적인 인물, (3) 한국미술사에서 문인화 계통의 최고 정점의 화가로서 가장 큰 특기는 묵란(墨蘭)의 제 일인자이다. (중략)
그와 같은 추사의 여러 가지 업적 중에서도 그의 가장 큰 특기인 묵란에 관한 사항으로써 과연 추사 김정희는 한국 묵란화의 제일인자이긴 하지만 그는 난을 직접 재배하면서 난을 사랑하는 애란인이었을까?”(저자의 말)
이렇게 시작한 추사의 난사(蘭史)에 대한 기행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난분 그림과 양란(養蘭) 활동을 통한 조선시대의 난문화 조명과 함께 草衣장의순의 <동다송(東茶頌)>을 통해‘추사의 방에서 난향이 풍긴다’라는 내용을 찾아내어 추사가 직접 난을 재배하는 애란인이었임을 밝혀내었다.
55세~63세까지 9년 간의 제주도 유배시절 추사의 난향을 찾으려는 작업 중에 저자는 제주한란의 사적 고찰, 부작란도, 난맹첩에 관해 고찰하였고 김석준, 허소치, 심희순 등에게 보낸 편지 등을 통해‘유배시절 추사는 그의 적거지에 칩거하였다’라는 통론에 반대되는 제주에서의 추사 행적을 살펴보게 되었다.
또한 추사는 자신의 아들 상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난을 치는 데 난초의 참모습을 그대로 그려야 한다는 기심(欺心)과 반드시 세 번 궁글려야 한다는 삼전(三轉)이라는 화론(畵論)을 펼치고 있음을 조명하였다.
특히, 부작란도에 어지러이 찍혀져 있는 낙관의 정체, 부작란도의 화제와 유마경의
불이법문(不二法門)과의 연관, 피카소와 추사의 비교 등을 재미있게 고찰한 내용이 흥미롭다.
“추사를 현대 추상화와 연결시키는 작업은 필자가 처음으로 시도한 새로운 말은 절대로 아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피카소와 추사를 연관시키는 말을 필자는 오래전부터 수없이 들었기 때문이다.
원로시인 김구용(金丘庸) 선생님을 찾아가 이야기를 듣다보면‘피카소가 추사의 글씨를 보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라고 선생님은 그 특유의 억양으로 하시는 말씀을 필자는 너무나 여러
번 들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저자의 말)
1990. 1월부터 1994. 6월까지 긴 기행 여정을 마치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힌바 있다. “필자는 이 글을 쓰다보니 처음 생각보다 긴 시간 동안 예상을 넘어서 쓰게 되었다.
그 중에는 여러 가지 잘못된 부분이 많이 있음을 자인하면서 독자 여러분의 기탄없는 비판이 있더라도 감수할 것이다. 무엇보다 바라고 싶은 것은 한국 난문화에 대한 자료라면 크고 작고를 가리지 않고 보내 주실 것을 부탁드리는 바이며, 그간 본고를 연재해 주신 <난과생활사>와 애독하여 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리면서, 다음 자료가 또다시 준비되어 본고를 더 연장하여 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본다.”(저자의 말)
추사의 난향 이후 2년 6개월 간 난 역사 기행을 중지한 저자는 이후 마지막으로 1997. 1월~1997. 10월까지『향파(香坡) 김기용 연구』를 통해 한국 난 역사 기행의 대미를 장식하였다.
저자는 향파 김기용 연구를 통해 가람 이병기 선생과 함께 한국 현대 난사의 출발이라 할 수 있는 향파 김기용 선생의 난사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가람과 향파 난 재배는 누가 먼저 시작 했을까?’
“(가람의 일기와 향파에 대한 신문기사 등) 이상의 기록을 보았을 때 향파가 난을 재배한 것은 농업학교 재학시절이며, 그렇다면 1932년도가 된다. 그러므로 1933년 7월부터 난을 시작한 가람보다 약 1년 앞서있다. 연령으로 따지자면 가람보다 24년 후배지만 난 재배 기록으로 볼 때는 가람보다 1년 선배라고 할 수 있다.”(저자의 말)
‘가람과 향파 난 재배는 누가 먼저 시작했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하여‘가람이 ’30년대를 대표하는 난인이라면 향파는 ’60~’70년대를 대표하는 난인이라 할 수 있다’라는 결론과, 향파와 정을병의 만남까지의 역사 기행을 통해 저자는 한국 난 역사의 뿌리를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한국자생란보존회’를 발기하고 난의 민족주의를 주장한 정을병의 난의 민족주의에 대한 뿌리를 밝혀본다면 그 뿌리는 향파에 이르고, 다시 그 뿌리의 근원은 가람으로 이어지며, 가람의 한국란에 대한 민족주의는 멀리 거슬러 올라가서 강희안의 <양화소록>으로부터 공급받은 자양분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저자의 말)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유난히 책이 많았다. 당시 아버지는 지물포에서 장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시면 항상 책을 읽으시고 원고지에 글을 쓰셨다. 밤에 자다가 깨면 늘 책읽고, 글 쓰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다시 잠들곤 하였다.
1992. 12월 월간‘난과생활’에는 당시‘한국난문화산고’를 연재 중인 아버지를 인터뷰한 이신덕 기자가 쓴 아래와 같은 기사 내용이 있다.
“지금 연재 중인‘한국난문화산고’를 마치고 난에 대한 책을 한권 쓰고 싶다는 그의 작은 소망이 좋은 결실로 나타나기를 기대해본다. ‘가람의 난향’에서‘추사의 난향’에 이르기까지 그가 숨어있는 韓國의 蘭歷史를 찾아서 정리해놓은 우리 난사(蘭史)의 기록은 우리 난계의 소중한 기록으로 빛을 발하게 되리라.”
(1992. 12월‘난과생활’기사)
이번에 발간하는『숨어있는 한국의 난(蘭) 역사(歷史)를 찾아서』는 아버지의 많은 노력과 애정이 깃든 책으로 아버지의 작은 소망이 결실로 나타난 것이라서 더없이 기쁘고 아버지가 정리해놓은 한국 난사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 앞으로 한국 난 역사의 소중한 기록으로 별처럼 빛나고 蘭香처럼 香氣발하기를 더없이 기원하는 바이다.
이 책을 쓰는 데 많은 조언과 교정을 도와주신 이국주 선생님·김혜림님, 향파 김기용 연구를 위한 각종 자료를 제공해주신 이봉균님, 그리고 흔쾌히 이 책의 제자(題字)를 써주신 봉선사 주지 정수 스님께 감사드리고, 출판을 승낙해주신‘난과생활’강법선 사장님과 오래된 아버지 원고를 찾아주시고 정리해주신‘난과생활’이영규 선생님께 특히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1990. 1월부터 1997. 10월까지 아버지 연재를 애독해주신‘난과생활’독자 여러분께 아버지를 대신하여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이 책의 발간을 너무나 고대하셨던 사랑하는 어머니, 그리고 지금은 우리 가족의 마음 속에 살아계신 아버지 영전에 이 책을 바친다.
생각하니 이제껏
도움만 받고 살았네
남도 나를 도와주니
나도 남을 도와야지
그것이 뜻대로 안되나니
그를 시름하노라
(1987년 서사시조집『호명산 농가』中, 최병로 著)
2015년 5월
최 유 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