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골소심(鐵骨素心)
중국에는 많은 종류의 난들이 있다. 봄에 꽃이 피는 춘란도 있고 여름철에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청향을 내뿜는 하란이 있는가 하면, 하얀 꽃들을 알알이 달고 한 줄기 바람결에 상큼한 향기를 내는 추란이 있어 이론적으로 사계절 언제나 난꽃을 볼 수 있는 곳이 중국이다.
겨울이 다가오면 그 청초한 잎을 자랑하는 한란이 아름답게 꽃을 피우는데 그 향기 역시 일품인데다 꽃마다 각기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향기를 가진다.
그밖에도 설날 아침, 지난해에 베풀어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서너 촉 안고가면 톡쏘는 듯한 코티분 향내를 온 골목 안에 퍼트리는 보세란이 있는가 하면, 한란과 춘란이 자연교배 되어 특별한 향기를 갖는 춘한란도 이곳에서 자란다.
그것뿐이랴! 억새풀같이 길게 자라면서 흔히 병풍이나 족자에 그림으로 보여주던 일경구화도 모두 중국의 난들이다. 그밖에 오지란, 검란 등 이루 헤아리기 곤란할 정도다.
이들 난들 가운데 가을에 꽃을 피우는 추란소심은 조금씩 그 모양새와 꽃 달림이나 향기가 달라 이들을 구별하여 관음소심, 13학사, 용암소심, 철골소심 등 그 종류만도 수십 개에 달한다. 그 가운데 철골소심은 잎이 억세고 단단하며 약간 잎맥을 따라 좁아져 있는 모양을 가지면서 늘어지지 않고서 있는 잎성을 특징으로 한다.
꽃 역시 하얀 눈(雪) 백색에 가까운 깨끗한 흰색을 보이며 향기도 일품이려니와 조건이 여간 맞지 않으면 꽃을 잘 달지 않는 품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철골소심만 오로지 재배하는 한 난재배가가 있어 같이 간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을 끌었다.
지금부터 약 20년쯤 이제 막 우리나라가 난 붐이 일어나 모든 산천이 몸살을 앓던, 우리나라로 보면 난 취미의 초기 때의 일이다. 난잡지사 K사장이 난의 본고장인 중국에 건너가 난재배 실태를 취재하던 가운데 알려진 일이었다.
그곳은 선대로부터 난재배가 대물림 되어 오는 곳으로 한 동네에 여러 집이 비록 영세하지만 그들 나름대로 옛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다. 익히 우리들이 알고 있는 난석은 화분도 없이 그냥 대나무로 바람이 들어오고 햇빛이 스며들 만큼의 공간만 확보하면 냇가의 모래흙이나 그냥 그대로의 흙을 식재로 하여 땅바닥에 노지로 재배하고 있다.
기후가 좋아서 그런지 분주당식인 세촉도 지키지 않았으며 한촉씩 쪼개어 그대로 흙 속에 벼 심듯 쑤셔 넣은 후 그대로 두기도 했다. 그래도 자라기만 잘 할 뿐 아니라 꽃도 잘만 핀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기르는 사람들 가운데 유독 이 마을에서 제일 위쪽에 자리잡은 한 늙은이가 있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철골소심만 오로지 고집한다는 소문이 있었던 것이다.
K사장은 잔뜩 기대에 부풀어 같이 간 안내원을 통해 이 특별한 늙은 배양가를 만나 단독 인터뷰를 시도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보기좋게 거절을 당했다. 원래 줄국사람들은 난을 재배하지 않아도 한국의 잡지사 사장이 인터뷰를 요구하면 거의 거절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노인은 일어지하에 거절해 버렸던 것이다.
철골소심만 기르는 큰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혹시 특종이 걸릴지." K사장은 회심의 미소를 띄우며 이번엔 촌장에게 압력을 넣어 보기로 하였다. "그 영감태기 말입니까?" "어떻게나 고집이 센지, 남의 말 절대 듣지 않습니다."
촌장도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걸 봐서는 여간내기가 아닌 것 같았다. 이 지경이 되자 K사장은 몸은 달대로 달았는데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 고매한 영감님과 인터뷰를 꼭 성사시켜야 되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게 가졌다.
하룻밤을 꼬박 궁리를 해 보았지만 별 뾰족한 묘수가 있을 리 없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말만으로는 절대 안된다"는 것이었다. 많고 많은 추란소심 중에 철골소심만 기르는 영감에게 많고 많은 말 중에 그냥 말만으로 될 리가 없다는 결론은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이 마을을 떠나 딴 곳으로 가야할 일정이 K사장에게는 기다리고 있었기에 거금을 취재 대가로 선불하고 겨우 허락을 받는데 성공했다.
예상외로 돈이란 놈은 이렇게 중국인들로 하여금 사람을 단번에 감동하게 만든다. 머리도 단정하게 빗은 후 새 와이셔츠도 내어입고 눈에 드는 넥타이도 골라 매고서 카메라맨을 대동하여 이 마을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그 고상한 영감씨 댁으로 갔다.
대문일리가 결코 아닌 쓰러진 담 사이를 지나 안으로 들어간 곳은 집이 아닌 움막이다. 이윽고 다 헤어진 넝마를 걸친 한 노인이 허리를 펴지도 못하고 나와서 인사를 하는데 그 노인 뒤편에는 대나무로 지어논 닭장 속에 철골소심이 심어져 있는게 보였다.
사람의 눈은 정말 바보 같아서 분위기 마력에 언제나 약하기 마련이라 이 걸레 같은 누더기를 입은 노인조차 심심산골에 은둔해 사는 백이숙제처럼 보인다. 그리고 다 허물어진 움막도 도를 닦는 도량으로 상스러워 보였다.
심지어 궂은 날에 산자락을 타고 피어 오르는 물안개까지도 그 신비함이 돋보였다. 모두가 그 도사님을 따라 닭장 안 철골소심이 있는 곳으로 우루루 닭처럼 몰려 들어갔는데 십여 평 되는 그곳에는 철골소심이 이상하게 한 촉씩 떼어져, 벼를 도정하고 난 왕겨를 섞은 황토를 식재로 이용하여 배양하고 있었다.
이것도 이때까지 보지 못하던 것이라 정말 이 사람은 철골소심의 달인같아 보였다. 아마도 그의 입으로 흘려 나오는 말들은 우리 난계를 위한 금과옥조가 틀림없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들어 옷깃을 여미고 속인이 부처를 대하듯 그의 입을 응시했다.
"왜 도사님은 철골소심만 고집해서 재배합니까?" 물어보는 통역의 질문에 잘못 알아 들은 듯 눈을 찡그리며 자신의 귀에 손을 갖다대고 엄숙하게 얼굴을 굳힌다. 다시 한 번 물어보는 통역의 말에 이제는 그 말귀를 알아 들은 듯 제대로 성하게 남아 있는 이빨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입을 한껏 벌리고 파안대소한다.
그리고 얼마동안 뜸을 들이는데 과연 어떤 진리가 도사의 입에서 흘러나올지 모두가 긴장하여 귀기울이고 숨을 죽이고 잇는데, 통역과의 대화는 의외로 짧게 끝났다. 원래 참진리란 짧은 말 속에 그 뜻이 함축되어 있다지 않던가? 통역이 눈을 껌뻑이며 말하길. "이 종자밖에는 물려받은 것이 달리 더 없기 때문이라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