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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건 칼럼>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 나가다
기사입력  2022/04/27 [21:06]   이대건 난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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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건 대한민국농업명장     ©김성진

 

난초 명장의 성장일기(2)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 나가다!

 

 

(전문)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 어쩌면 난초 명장이 되는 길을 열어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기회가 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더라면 내가 난초와 인연을 맺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내 힘으로 모은 돈으로 군 제대 후 난원을 열었다. 70만원의 종자돈이 난초 명장이 되고 자산가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시작점이 된 것이다. 나는 그렇게 좌충우돌하며 내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며 나아갔다.” - 본문 -

 

어린 시절 우리 집 살림은 넉넉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자녀를 키우기 위해 억척스럽게 돈을 벌기 위해 다니셨다. 밥을 굶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머니를 보면서 나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마음에 형성된 후부터 나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초등학교 시절에 빈병과 고철, 박스, 종이를 주어다 팔았다. 전봇대 공사를 하면 부리나케 달려가 진을 치고 있었다. 잘려진 전선 가닥을 줍기 위해서였다. 시간이 나면 공장 주변과 공사장을 다니며 돈이 될 만한 것들은 보이는 대로 줍고 모아서 고물상에다 팔았다.

 

집 근처 섬유공장에 불이 난적이 있었다. 공장은 폐쇄되어 귀신이 나올 것처럼 스산했다. 나는 겁도 없이 공장으로 들어가 숯덩이 속에 박혀 있는 못과 장석을 뺐다. 공장 전체를 뒤적거리며 고물상에서 받아줄 물건들을 챙겨 개선장군처럼 고물상으로 향했다.

 

고물상 주인은 이상한 눈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 집 나온 고아냐? 아니면 거지냐?” 온통 숯검댕이가 된 모습을 보고 하신 말씀인데, 아직도 내 기억 속 서랍에는 고물상 아저씨의 말이 생생하게 저장돼 있다.

 

동네 어귀에는 번데기와 핫도그 장사를 하는 곳이 있었다. 번데기가 먹고 싶었는데 돈이 없었다. 어머니께 달라고 하면 얼마든지 주셨는데도 나는 스스로 돈을 마련해 번데기를 먹고 싶었다. 주인아저씨가 장사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종이컵에 번데기를 담아 손님에게 주었다.

 

나는 헌 책을 주어다 종이컵처럼 접어 번데기 장사에게 주었다. 납품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주인아저씨는 내가 접어 준 종이컵에 담아 번데기를 팔았으니 말이다. 나는 그 대가로 번데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내가 살던 동네근처 낙동강 변에는 분뇨처리 탱크로리의 속 찌꺼기를 버리는 곳이 있었다. 그곳에 동생과 함께 동전을 캐러 자주 갔다. 분뇨와 뒤섞여서 말라붙은 딱딱한 종이 뭉치 덩어리를 곡괭이로 찍어 해치면 심심찮게 동전이 발견되었다. 분뇨 속에서 주운 동전은 변색이 되어 동전인지 아닌지 분간이 어려웠다.

 

동생과 나는 변색된 동전을 가지고 논두렁에 놓고 신발로 밟고 비벼서 깨끗하게 만들었다. 동네 어른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공부나 하지 왜 그렇게 사느냐고 나무라시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즐겁고 신이 났다. 푼돈이지만 돈을 모으는 재미가 쏠쏠했기 때문이다.

 

나는 돈벌이가 되는 일이라면 물불가리지 않았다. 도둑질 빼고는 정말 많은 경험을 했다. 동네 끝자락 낙동강 변에는 수박밭이 있었다. 농사가 끝날 무렵이면 상품성이 떨어진 수박은 버리다시피 했다. 나는 그것을 리어카에다 실고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껌팔이도 해보았다. 껌 한 통에는 일곱 개가 들어 있었는데 나는 두 개를 빼고 다섯 개를 팔아 본전을 했다. 두 개를 마진으로 남기며 차곡차곡 돈을 모았다. 큰 봉지의 과자를 사서 작은 봉지에 나눠 팔기도 하고 쥐포를 도매 값으로 사서 낱개로 잘라 판매도 했다.

 

중학교 3학년 시절 아버지께서 편지봉투를 시장에 내다 팔았다. 아버지께 용돈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편지봉투를 팔아서 본전은 아버지에게 주고 마진을 가져가라고 하셨다. 동생과 나는 편지봉투를 한 가방 가득히 담아 매고 대구 서문시장에다 팔았다.

 

여름이면 낙동강 변 농수로에 있는 미꾸라지를 잡았다. 큰 비가 내려 물이 불어있는 것을 모르고 수로에 들어갔다가 큰물에 떠내려가고 말았다. 간신히 갈대뿌리를 붙잡아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어렵게 잡은 미꾸라지를 팔아 그토록 갖고 싶던 브랜드 운동화를 샀다. 학교에 두 번 신고 갔는데 도둑을 맞고 말았다. 내가 번 돈으로 사서 그런지 정말 속이 상했다. 도둑을 잡으려고 두 눈을 크게 뜨고 다녔지만 결국 잡지 못했다.

 

동네 어귀 유천교라는 다리에서 포장마차를 한 적도 있다. 포장마차 리어카는 동네 아주머니께서 하시던 것인데 사글세로 빌렸다. 근무가 끝나면 포장마차를 끌고 다리로 나가야했는데 키가 너무 작아 애를 먹었다.

 

어떤 때는 내리막길에서 포장마차가 뒤로 넘어가기도 했다. 힘으로 리어카를 제압해야 했는데 덩치가 작아 오히려 끌려갔다. 포장마차로는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군 입대 영장을 받은 후에도 두 달간 낚싯대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했다. 밤에 일을 하다가 장갑의 올이 기계 롤러에 말려들어가 오른손 검지가 분쇄절단이 되었다. 곧바로 응급실로 실려가 간신히 치료를 할 수 있었다.

 

군에 있을 때도 휴가를 나오면 동네어귀 진성반점이란 중국집에서 배달부로 일을 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용돈을 모으려고 애를 썼다. 군대를 제대하고 창업을 하려면 목돈이 필요해 부지런히 돈을 벌려고 했다. 전역을 앞둔 무렵에는 퇴근을 한 후 대구의 중심가 한일 극장 건너편 레스토랑에서 웨이터로 일을 하고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내 인생을 바꾼 인연을 만난 대구 승마장에서의 일도 그렇다. 하루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에 승마장으로 놀러가 말을 닦고 운동을 시켰다. 그때 만난 인연으로 군에서 난초를 기르는 병사가 될 수 있었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 어쩌면 난초 명장이 되는 길을 열어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기회가 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더라면 내가 난초와 인연을 맺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내 힘으로 모은 돈으로 군 제대 후 난원을 열었다. 70만원의 종자돈이 난초 명장이 되고 자산가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시작점이 된 것이다. 나는 그렇게 좌충우돌하며 내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며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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